- 2005/04/18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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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수업인 '문예창작의 이해' 시간을 통해 평론가 이명원씨를 만날 기회를 가졌다. 이명원씨는 23살의 나이에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비평가로 '문학권력 논쟁' 등을 주도적으로 제기하며 문단의 '이단아(?)'로 환호와 질시의 대상이 된 인물. 이명원씨는 자신의 삶의 궤적을 술회하면서, 평론가가 갖출 자질과 자신의 문학관을 강연했다. 그의 강론에 약간 살을 붙여 메모한 것과 느낀점을 적어 본다.
- 문학은 현실-나-세계의 삼각구도 속에서 나의 인식을 바탕으로 펼쳐진다.
-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과정은 문학의 출발이자 끝이다.
- 고독 속에서 나를 껴안는 작업이 바로 문학이다.
- 문학적 모델을 가져야 한다. 평론가는 음악의 지휘자에 비유할 수 있다. 음을 해석하고 변주하는 지휘자와 마찬가지로, 평론가는 작가의 고유의 창작물을 조직하고 통합하여 재창조한다.
- 자기성실성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읽고 효율적인 독서를 위한 시간 배분을 하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도 좋은 방법이다. 창작노트를 만들고 꾸준히 기록하여 언어를 장악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 열린 감각을 지녀야 한다. 문학은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다. 문학중심주의자가 되어 순수한 문학을 신봉하지 말라.
- 과도한 Dogma(신념)는 배제할 것. 평론가는 언제나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해야 한다. 객관화를 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 매몰되는 평론가는 쓰레기다. 자신만의 상자에 갇히지 말고 이질적인 세계와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하라.
- 쓴다. 모방 없이 창조는 없다. 모방을 체질화하되, 나만의 것을 창출하지 못하면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 고독과 고립을 두려워 하지 말 것.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라. 무난한 것은 예술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는 것보다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끊임없이 자문하라.
- 고백하라. 자기 약점에 대해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 독자를 설득하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독자의 읽기를 간섭해서는 안 된다.
- 2005/03/07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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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만 몰두했다. 다른 아무것도 신경쓰고 싶지 않았고,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저 웅크리고 싶었다. 한껏 감상에 젖어 내키는대로 글을 적고 마음 속 가득한 우울함을 게워냈다. 글을 쓰면서, 도피만 반복하는 무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와 자존감 상실로 인한 자포자기의 점철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어두운 내면을 견뎌내지 못한 채 천천히 무녀져가던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자 타인의 관심으로 상처를 보상받아 자아를 지탱하려던, 어쩌면 처절한 호소였고 몸부림이었다. 이런 일을 거듭하며 엉킨 실타래를 풀듯 조금씩 스스로를 채워갈 수 있었다.
- 2005/03/07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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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화사한 나비였다. 날갯짓 아래로 영롱한 빛무리가 구슬처럼 맺히며 흩날렸다. 어둠 속 곳곳에서 수 많은 나비가 지고 생겨났다. 강렬한 빛에 가만히 눈꺼풀을 들었다. 차는 자작나무 숲을 빠져나와 호숫가로 접어들고 있었다. 다시 눈을 감자 순식간에 나비는 타들어갔다. 저 반짝이는 물결 속에 숨은 것일까. 어둠 속에선 빛너울만 아스라이 남았다.
- 2005/03/07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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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게 살짝 숙인 고개와 상대를 응시하는 다정한 시선,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과 자신감으로 빛나던 안색. 모든 것을 다 가진 표정. 그 순간만큼은 세상 무엇보다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탄으로 여자를 바라보다 문득 무언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숙명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어 나를 괴롭게 하던 결핍감의 실마리를 찾은 듯한 느낌. 내가 진정 바라던 것이 무엇인지 얼핏 느낄 수 있었다.
- 2005/03/07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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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이었다. 대낮이었지만 온통 먹구름 뿐이라 어둑어둑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았다. 생각지도 못한 전화에 몹시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려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녀는 느닷없이 쏟아지는 소나기 탓에 학교에 발이 묶인 모양이었다. 내게 우산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물었다. 대뜸 가겠다고 답했다. 급히 우산을 챙기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억수같은 비가 세차게 내리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우산을 건네받고 기뻐할 그녀 얼굴 뿐이었다. 한시바삐 도착해야 한다는 조바심 탓인지 시간은 한없이 느리게 흘러갔고, 초조한 마음은 갈수록 달아올랐다.
드디어 지하철 목적지에 열차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냅다 뛰었지만, 장대비를 피하려는 행인들이 빽빽히 들어찬 출구를 빠져나갈 수 없어 반대 방향 출구로 돌아 나왔다. 역에서 학교까지 거리는 꽤 멀었지만, 무턱대고 달렸다. 바람처럼 내달리는 속도에 활짝 펼쳐진 우산이 하늘하늘 춤췄다. 흠뻑 젖은 얇은 옷 위로 후끈거리는 열기가 턱밑까지 차올랐다. 찰박찰박 물차는 소리와 함께 온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듯 했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도서관 입구까지 쉴 틈없이 질주했다.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단숨에 언덕을 올라갔다. 비에 홀딱 젖고 흙탕물에 범벅인 꼴이 엉망이었지만 차림새를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서두르다 그만 도서관 입구의 계단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녀는 도서관 입구에 나와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온몸을 뛰놀던 기묘한 열기가 쏙 숨었다. 엉겁결에 우산을 접었다.
- 2005/03/0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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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는 순간에 눈길이 서로 맞닿지 않으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한 여자가 있었다. 우연히 손을 스치면 얼얼하고 쭈뼛한 감각을 아로새기고, 어쩌다 옆자리에 앉은 무릎이 맞닿으면 군불 같은 화끈한 온기를 건네던 사람. 나는 그이로 인해 열병을 앓았다.
헤어짐의 인사 후, 그녀는 돌아서면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하염없이 뒷모습만 바라보며 바보처럼 손을 흔들고 실실 웃다가, 무심한 그림자와 함께 종종걸음으로 걷던 차가운 구두 소리마저 짙은 어둠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지면, 그제야 참고 참던 긴 숨을 토해내곤 했다. 발걸음을 돌리며 어리숙한 자신을 신랄하게 자책하다가, 밀려드는 짙은 공허감에 화들짝 놀라 서러워졌다. 집으로 향하는 신호등 앞에서 마음을 단단하게 벼려 먼저 돌아서리라 다짐하곤 했다.
시간이 흘러 어떤 이를 알게 되었다. 밤이 다하도록 함께 술을 마시고 헤어질 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려 걷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그와 시선이 닿았다. 마주침에 그가 멋쩍게 웃었는데 정갈하면서도 환한, 보기 드문 신선한 웃음이었다. 서먹한 거리감이 단숨에 날아갔다.
참 선한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2005/03/0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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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을이 좋다. 계절마다 각기 뚜렷한 특징이 있고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럽지만, 각별히 정을 둔다면 단연 가을을 꼽고 싶다. 가을의 절정에 붉은 낙엽을 머금은 바람에는 특유의 푸른 냄새가 풍긴다. 한적한 자연 속에 드러누워 맑은 하늘을 응시하면, 바람에 실린 그 내음이 볼을 미끄러져 귀밑을 타고 어깨로 흘러내려 팔을 적신다. 온몸으로 그 감각을 아로새기면, 어느새 청명한 하늘이 마음속에 가득 차올라 온갖 번뇌와 근심을 말끔히 씻어내 주는 것이다. 이윽고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추억으로 곱게 여민 따스한 기운이 샘솟는데, 그 신비한 희열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뼛속까지 범하는 한기가 아니라 살결을 타고 몸으로 흐르는 부드러움. 선선히 머물다가 벅차도록 포근해지는 그 여운을 가장 사랑한다. 그래서 나는 가을 바람의 그것처럼 언뜻 스칠 때, 가슴을 일렁이게 만드는 사람이 좋다.
- 2005/03/06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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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서운 강바람이 연일 몰아쳤다. 혹독한 추위에 맞댄 뺨에선 빙수가 콸콸 솟아나오는 듯 했다. 피부 속 깊숙히 스며들던 철봉의 차디참. 덜덜 떨리던 어깨. 감각이 무뎌져 금방이라도 떨어져나갈 듯 화끈거리던 귀와 코. 입을 나오자 마자 뒷걸음질치며 목을 쓸고 지나가던 뽀얀 입김. 초조한 기색으로 시계를 들여다 보다가, 미련이 담긴 눈으로 문을 응시한 후 어려운 발걸음을 떼었다.
스스로 정한 규칙이었다. 하루 10분 동안. 놀이터에서 서성이며 그녀가 사는 집 대문을 그저 바라보는 것. 시작은 단순했는데, 무작정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우연히 마주칠거라는 터무니없는 기대 때문이었다. 혼자만의 약속이니 상대가 시각에 맞춰 나올 리 만무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단 한 번 시선이 마주치지 못해도, 마냥 고집스럽게 문만 쳐다볼 뿐이었다.
계절이 변했다. 연둣빛으로 싱그럽게 익은 잎사귀의 틈을 비집고 쏟아지는 햇살이 따스했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지만, 결국 한번도 그녀를 보지 못했다. 낡은 그네 위에 걸터 앉아 맑은 하늘을 바라 보았다. 포근하게 얼굴을 휘감는 따스한 미풍, 선선한 감촉에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늘 보아오던 그 문이 낯설기만 했다. 이제는 그만두어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바람이 참 달착지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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